나 이동진 기자랑 같은 급인가?
며칠 전, 이동진 기자의 11월 추천책으로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수리보고서'가 소개되었다.
지난가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여러 감정들을 느끼며 좋은 경험을 했기에, 대기자와 눈높이가 같다는 생각에 잠깐 설레었다.
'내가 먼저 리뷰를 할걸 ㅎㅎ', 하는 아쉬운 생각에 지금이라도 몇 자 적어본다.
[줄거리]
창경궁 내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인 '대온실'의 수리를 맡은 건축 사무소로부터, 문화재수리백서 작성을 부탁받은 '영두'는 어린 시절 창경궁 인근 원서동에서의 좋지 않았던 감정이 떠올라, 의뢰를 사양할 생각으로 파주의 건축사무소를 방문한다. 그러나, 거절하러 간 자리에서 관련 사전까지 받으며 이래 저래 거절은 못하고 보고서 작성 일을 맡게 된다.
현장방문을 위해 창경궁으로 온 '영두'는 창경궁 서쪽 동네 원서동을 다시 찾으면서 십대시절 중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 온다. 할머니의 친구라는 안문자 할머니가 하는 '낙원하숙'이라는 곳에 머무른다. 낙원하숙에는 문자할머니의 친척이라는 동갑내기 리사가 이미 그곳에 머무르며 둘은 강남의 같은 중학교를 다닌다.
영두는 늘 찬바람 부는 리사와 잘 지내지 못하고, 원서동에서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석모도로 돌아온다.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시절, 창경원의 서쪽 동네라는 뜻의 원서동을 온실백서 작성을 위해 다시 방문하면서, 낙원하숙을 찾는다. 이미 빈 집이 된 낙원하숙은 보며, 그곳을 살뜰하게 관리하던 문자 할머니가 떠오른다.
한편, 영두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대온실이 만들어진 배경과 관리이력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된다. 조사과정에서 영두가 발견한 온실 관리자 중 한 명인 '박목주' 이름을 지금 텅빈 낙원하숙에서 발견한 편지에서 다시 만난다. 온실수리를 위한 지반 조사를 하던 건축사무소팀은 온실 밑에서 뼈가 묻힌 것을 발견하고, 이것은 사람의 뼈인지 동물의 뼈인지 확인하려면, 수리공사자체를 확장해야 하기에 창경궁관리사무소의 담당 공무원과 갈등을 빚는다.
각기 개별의 이야기였던 일들은 소설 말미로 갈수록 낙원하숙으로 모여든다.
이 책을 선뜻 고른 이유는 내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6년을 원남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왜 원남동인지는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창경원의 서쪽 동네라 원서동이였다면, 원남동은 창경원의 남쪽에 위치한 동네였던 것이다. 주인공 영두처럼 나의 원남동 시절 기억도 그리 좋은 기억은 없다. 축대 옆에 가건물처럼 지어진 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학교 친구를 집에 데려온 일이 없다. 행여나 학교 친구가 우리 집을 알까 봐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집에 간 적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영두의 감정에 내 감정도 자주 동요되었다.
해방되기 전, 문자할머니는 창경원을 제 집 마당 드나들듯하며 컸다. 일본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문자할머니는 , 해방이후 문자할머니의 삶은 원서동 집을 지키기 위한 삶이었다. 영두는 백서작업을 하며, 문자 할머니의 삶을 더 가까이 보게 되고, 할머니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완성한다.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원서동을 방문했다. 문자할머니와 영두가 걸었던 궁궐 옆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리사와 영두가 다투던, 궁궐 담 끝의 빨래터를 보고 싶었다. 김금희 작가의 힘이다. 작가는 읽는 내내 나를 자꾸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원서동 길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드물에 고요하고 멋스러운 길이다. 문화재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집들이 세월을 거슬러 서 있는 모습이 멋스러울 뿐이다. 주변 카페의 2층만 올라가도, 창덕궁 돌담길 너머 궁이 보인다. 돌담이 주는 설렘 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다 알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대온실을 방문한 날은 비가 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경궁 내를 걸어 춘당지를 지나 가면 이곳의 모든 것과 이질적인 하얀유리의 대온실이 서 있다.
아주아주 오래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내 기억엔 아름다운 온실이었는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간신히 서 있는 어설픈 서양식 건물이었다. 왠지 지나간 식민시대의 잔재처럼 초라했다. 관리도 잘 되지 않는 듯, 온실 안의 식물들도 찾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대온실수리보고서의 슬픈 이야기와 잘 어울렸다.
어느새 겨울이 깊어진 날씨이다.
책을 읽는 이에게 원서동 길을 빙 돌아 창경궁 산책으로 대온실을 방문하는 길을 꼭 한 번 걷어보길 추천한다.
'활자 중독자의 독후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눈부신 슬픔 한강 작가의 ‘소년의 온다’를 읽고 (0) | 2024.10.19 |
---|---|
[일본만화]오늘만큼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게 되는 만화 '룩백' (0) | 2024.10.17 |
[북리뷰]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반한 이야기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2) | 2024.10.15 |
[북리뷰]직장인으로서의 은행원이란...은행소설의 1인자 이케이도 준의 '샤일록의 아이들' (3) | 2024.09.20 |
[북리뷰]불안한 상상력의 작가 정유정 신간. 영원한 천국 (0) | 2024.09.12 |